이경무는 적의 주둔지를 거칠게 내달렸다. 어차피 사방이 다 적이니, 마음대로 들이받고 무기를 휘둘러 죽였다. 저 멀리 수평선에서 석양이 지는 중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퍼억! 퍼벅! 퍽! 휙! 퍽!

“젠장! 뭐야!”

“군단장님이 죽었다!”

뿌우우우우-!

주둔지는 금방 소란스러워지고 적들이 우왕좌왕했다. 이경무는 한바탕 치고 달리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뒤에서 호위로 따라온 두 무사가 애를 먹고 있는 게 보였다. 한 명은 말을 타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말을 못 탄 채였다.

주변에 있는 적들이 맹수를 사냥하듯 창을 겨누고 있었다. 이경무는 대번에 그들에게 달려갔다.

그러는 와중 땅에 서 있던 무사 한 명이 엇갈린 적들의 창에 짓눌리는 중이었다. 안 찔린 것만 해도 다행인데, 여러 명이 짓누르니 당해낼 수가 없어 바닥에 넘어졌다.

이경무가 대단한 거지, 실제 전장에서는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무기 한 번 제대로 휘둘러보기 힘들었다.

마침 그때 이경무가 나타나 무사를 압박하던 적들을 들이받았다. 갑옷을 입은 장정들이 종이 인형처럼 튕겨 날아갔다.

퍽! 퍼버벅! 퍽!

히히힝-!

“왕!”

무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경무는 대답 대신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넘어진 그를 강제로 일으켜 세우고는 말에 태웠다. 그리고 말의 궁둥짝을 찰싹 때리며 소리쳤다.

“동문으로 가서 아군과 합류해라!”

반대로 된 거 아닌가? 호위 무사가 왕을 지켜야 하는데, 왕이 호위 무사를 구해내 탈출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워낙 어지럽고 혼란스러워 실랑이 벌일 틈이 없었다.

이경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제대로 시선을 끌기 위해서 군단기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친 그림이 수놓인 깃발이었다.

이경무는 황소처럼 적들을 들이받고 호랑이처럼 검을 휘둘러 길을 냈다. 그러자 우왕좌왕하는 적들이 손 쓸 틈도 없이 밀려났다.

마침내 기수를 죽여버리고는, 그 깃발을 빼앗아 서쪽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묘하게 위화감이 일었다.

“궁수우-! 위치로오-!”

“투척병! 투척벼엉!”

“4연대는 나를 따르라!”

“2연대 집하압-!”

이경무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최고 우두머리를 죽였는데, 적들은 상황을 수습하며 점점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경무의 특기는 적의 대장을 단숨에 죽여서 적병들이 혼란에 빠지면 그때 기세를 몰아 흩어버리거나 쫓아내는 전법을 쓰곤 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군단장이 죽었음에도, 즉 머리가 없음에도 군단은 죽지 않았다. 사령관, 지휘관, 하사관, 선임병, 일반 병사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조직화 된 군대인 것이었다.

몇몇 부대는 배를 지키기 위해 주둔지를 나가고, 다른 부대는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기 위해 움직였으며, 또 다른 부대는 화재를 진압했다. 막무가내로 이경무의 별동대를 쫓기보다 포위망을 형성하려는 것이었다.

이경무를 쫓는 건 잘 훈련된 추적꾼들이었다. 위에서 누가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알아서 착착 움직였다.

솔직히, 그동안 정원국이나 덕수국의 전쟁은 소동 왕을 제외하고 동네 패싸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무사끼리의 싸움에서 한쪽이 이기거나 지면, 병력의 숫자가 어찌 되었든 그대로 승패가 결정되는 그런 싸움이었던 것이었다.

처음으로 군대 다운 군대를 본 이경무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각 부대가 현장 상황에 따라 알아서 대처하는 군대.

그러나 감탄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이거 이러다간 데리고 온 소수의 별동대가 전멸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시선을 끌고 별동대가 반대편에서 배를 태우는 작전이었는데, 이게 먹혀들지 않고 있었다.

“군단기를 빼앗아!”

“야만인 왕이 여기 있다!”

이 와중에도 이경무를 잡기 위해 마치 사냥꾼 같은 병종들이 모여들었다. 그물과 짧은 창, 투척용 무기, 쇠뇌로 무장한 이들이었다.

이경무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군단기를 화톳불에다가 태워버렸다. 그러자 그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군단기란 명예이자 목숨 그 자체이기 때문이었다. 전투에서 패배해도 군단기는 가지고 돌아와야 명예를 지킬 수 있었다.

“허억!”

“저, 저저저!”

이경무는 제국의 17군단기를 태워버리고는 적들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물이 활짝 펼쳐지며 이경무를 덮치는데, 거의 신검이나 다름없는 검이 허공에서 그물을 깔끔하게 잘라냈다.

몇몇은 놀라서 물러나고, 몇몇은 용기 있게 맞섰다. 그러나 용기 있는 자들은 모조리 죽었다.

쉬잉! 휙! 휘익!

마치 회초리를 휘두르는 듯한 날렵한 칼질이 펼쳐지자 심각한 상해를 입은 적들이 와르르 쓰러졌다. 경험 많은 병사들도 이경무를 상대로는 뭘 어쩌지를 못했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은 와중, 해는 점점 지고 있었다. 원래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야간 작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경무는 두 다리로 뛰어서 적들을 뚫었다. 그리고 곧장 주둔지의 성문으로 향해 내달리니, 중간에 오와 열을 맞추어 밖으로 나가는 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자기 할 일만 신경 쓰느라 이경무가 옆에 와도 몰랐다. 날도 어두컴컴해져서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경무는 마음대로 검을 휘둘러 마구 죽여 부대 하나를 다시 한번 혼란에 빠트렸다.

마침내 주둔지를 빠져나오니 정박해 있던 배들이 저녁의 어둠을 불사르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원래 목조선 시대에는 서로 묶어서 정박했기 때문에, 삽시간에 번진 것이었다.

그래도 워낙 배가 많아 이제 겨우 너덧 척이 불타오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경무는 마음이 급해서 곧장 배들이 불타는 곳으로 달려갔다. 중간에 전장으로 향하는 군단병들을 휙휙 지나쳤다. 희한한 일이었다.

바닷가는 이미 처절한 싸움이 펼쳐지고 있었다. 첨벙첨벙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리고, 배를 태우는 불꽃에 의지하여 적과 아군을 구별했다. 수없이 많은 화살이 바닷가에 꽂혀 있었다.

이경무는 저 성가신 궁수부대로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지치지도 않는지, 타오르는 불꽃처럼 맹렬했다.

“어딜 보는가! 이 멍청한 것들아! 내가 왕이다아아아아!”

이경무는 아군을 하나라도 구하기 위해 최대한 시선을 집중시키려 노력했다. 적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장단 삼아 검을 휘두르니, 마치 불꽃 축제에서 칼춤을 추는 듯했다. 온몸이 피범벅이었다.

솔직히, 적들의 눈에는 야만인도 이런 야만인이 없었다. 흉포하고 사나우며, 힘과 체력이 인간이 아닌 수준이었다.

“왕! 왕께서 오셨다!”

“왕이 저기 있다!”

처절하게 싸우던 50명의 특공대가 이경무를 발견하고는 와르르 뛰어왔다. 작전이고 뭐고 없었다. 그저 이경무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것밖에는.

무사와 병사들은 앞과 뒤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이경무를 따라 달렸다.

적들은 효율적으로 부대가 배치되어 겹겹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경무와 병사들은 그것을 하나하나 다 격파하며 나아갔다. 사실 기세에서 크게 차이가 나 적들은 모래성 허물어지듯 와르르 무너졌다.

그나저나 상식적으로 후퇴란 적들이 있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야 맞는 것인데, 이경무는 오히려 적들을 뚫어버리며 지나갔다. 그러자 적들은 쫓아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야간 작전이 되어버린 기습은 새벽이나 돼서야 끝났다. 완파시킨 배가 5척이고, 반파된 배가 10척이었다.

아군이 있는 진채로 돌아오니, 다들 넋이 나가서 구경했다.

50명의 별동대는 모두 꼴이 말이 아니었고 밤새도록 싸웠음에도 지쳤다기보다 눈빛이 흉흉했다. 가장 놀라운 건 전사자가 한 명도 없단 점이었다.

하지만 이경무는 신경질적으로 갑옷을 풀어 헤치며 바닥에 던지고는, 물동이를 통째로 들어 머리에 부었다. 그러자 진득한 핏물이 촤악 씻겨 내려갔다.

칼을 땅에 박아버리고 우물 근처에 앉아 쉬는데, 정암 장군과 영주들이 몰려들었다.

“와, 왕이시여, 괜찮습니까?”

이경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만 끄덕였다. 마음이 마냥 가볍지는 않은 게, 생각보다 적들의 수준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었다. 현재 남부군의 숫자는 천 명 남짓이었다.

전체적인 수준 차이가 적들이 월등히 뛰어난데, 숫자도 10배나 더 많았다. 객관적인 전력만 놓고 보면, 전쟁에서 지게 생긴 것이었다.

도대체 제국이란 게 뭐지? 어떻게 저런 군대를 배에 태워서 멀리 보낼 수 있는 거지? 도대체 나라가 얼마나 부강하길래 그게 가능한 거지?

“어찌 된 겁니까? 배를 태운 겁니까?”

“적의 총대장을 죽였다. 그리고 배는 생각보다 크고 많더군. 한 대여섯 척 태웠을까.”

이경무는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으나, 귀를 쫑긋 세우고 듣던 영주들은 눈에 띄게 반색했다.

“오오!”

“큰일을 해내셨습니다. 참으로 큰일을 해내셨습니다.”

“이제는 본대를 몰아서 적들을 치면......”

“아니.”

영주들이 흥분해서 막 내지르는데 이경무는 찬물을 끼얹듯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이거 이대로 가면 진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훨씬 강한 나라들이 있는 모양이다. 일단은 진채를 더욱 튼튼히 하고 요충지마다 요새를 세워야 해. 직접적으로 야전에서 붙으면 반드시 진다. 여왕에겐 내가 말할 터이니 너희는 방어에 힘써라.”

이경무가 심각하게 말하자 영주들도 뭔가 심상찮음을 느꼈다. 그들은 적들의 전진 기지만 봤지, 본거지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어쨌거나 이경무가 비제이뱃 나가지 말고 방어에 집중하라고 하니, 영주들도 일단 그 말을 따랐다.

그러는 한편 이경무는 경화에게 편지를 써서 일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며, 자신이 직접 경험한 적들의 수준과 힘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그냥 지방에서 일어난 난리 같은 게 아니라, 나라가 망할 수도 있음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나는데, 적들도 단 50명에게 습격받아 군단기와 배가 불탄 사실이 적잖이 충격적이었는지 사절을 보내왔다.

철판 갑옷에 그을리고 때가 덕지덕지 묻은 망토를 걸친 자였는데, 투구가 특이하게 깃털이 마구 꽂혀 있었다. 병사들은 이국적인 인종에 이국적인 갑옷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이경무 앞에 와서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고는, 다른 말 없이 두루마리 하나를 품에서 꺼내 건넸다. 거기엔 희한하게도 덕수국이나 정원국의 글과 닮은 외국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